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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宗實錄』에서는 경상도 상주의 중모와 화령 등의 특정지역을 열거하면서 왕실소용기명 제작을 위해 중앙에서 감독관이 파견된 기록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상주의 자기 제작상황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연간에는 전국에 자기소와 도기소를 설치하고 공납의 형태로 왕실소용 도자기가 공급되었는데, 당시 전국에 4개의 상품자기소중 2곳이 상주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품자기 생산의 기술은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생기면서 지방에서는 공납용 상품자기의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분청사기와 백자를 만드는 기술로 전환되어 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예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그 변화를 확인할 수가 있다. 『慶尙道地里志(1424)』와『世宗實錄』『地里志(1454)』에서 보이던 상품 자기소는『慶尙道續撰地里志(1469)』에서는 중·하품으로 확인되고 그 수도 줄어드는데 『東與地勝覽(1486)』에서는 자기소와 도기소에 기록이 없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첫째, 15세기 중엽 경제적 안정과 함께 백자의 수요와 생산이 증가하자 군신의 차이와 사치를 이유로 백토산지와 백자생산 및 사용을 강력하게 규제하여 백자의 확대와 발전에 걸림돌이 생기게 되었다. 둘째, 銅器의 대체품으로 자기를 만들어 충당해야할 강제성과 당위성의 상실로 인해 자기수요의 감소를 초래하였을 것으로 본다. 셋째, 경기도 광주에 백자 관요가 세워지면서 『經國大典』에서 보이듯 지방에서 제작활동을 벌이든 사기장을 대거 관요제작에 편성시킴으로써 지방 가마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방인 상주지역에도 15세기 후반 이후 공납용 자기 생산의 필요가 없어졌고, 일반 지방관아와 서민들의 일상용기로 생산체제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사회적 배경과 요지별 시기구분

    광주 관요의 성립(1467~1468)이후 중앙에 공납의 형태를 벗어나 차츰 지방백자의 제작이 정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지역의 백자요지 47개소 중 그릇의 형태나 기형이 관요에서 출토되는 자기와 유사한 요지로 화현1요지, 신요1요지, 산현1요지, 백전 1요지와 충남 보령군 용수리 3호가 있다.

     충남 보령군 ‘용수리3호의 사발2형’ 은 ‘백전 1요지 사발2형’ 과의 굽과 구연부가 유사하다. 단, 굽외형의 몸통 언저리 부분을 용수리 3호는 둥글게 처리한 반면에 ‘백전1요지 사발2형’ 은 각이 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접시는 용수리 3호의 접시의 굽 안쪽에 굽칼의 흔적이보이며 모양 외에 외형과 구연부가 유사하다. 이것은 광주 분원의 인원구성이 경공장 외에 외공장이 교대로 조업을 담당하였음을 의미하며, 이는 지방의 장인이 분원에서 일정기간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 양식이 그대로 지방에서도 맥락을 같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도성인구 감소와 국가조세수취의 파탄은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도성중심의 교역 망을 파탄 지경으로 몰아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상인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안전한 지방에 정착하여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도성의 수복 이후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상인의 지방 정착은 도성의 상품교역을 위축시켰고 16세기 도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국적인 교역 망이 붕괴된 것이다. 한판 京中으로 반입되는 상품운송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던 三江 또한 제 구실을 못하였다. 전란과 계속된 관리들의 수탈로 삼강 민들이 모두 흩어져 남아 있는 주민들이 백에 한둘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래가 자연히 끊어지고, 지방상품의 도성 유입이 끊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임진왜란 중 설치된 場市가 지속적인 발전을 가지고와 장시의 수가 증가되어 5일장 체제가 17세기 전반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인다. 이렇듯 지방백자는 일반 백성을 수요자로 하는 만큼 지방의 장시에서 유통되었을 것이다. 지방의 시장은 주로 5일마다 열리는 정기시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부터 계속되는 흉년으로 농민의 살 길이 막막해 지자 정기장시를 상설시장화 할 것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16세기에 오면 상업 인구가 증가하고, 지방에 새로운 시장이 많아졌다. 이렇게 시장의 수가 증가해가고 상업인구가 늘어 나면서 17세기에는 점차 정기시장이 점차 상설시장화 되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수공업이 관장제에서 민간수공업체제로 전환하였음을 알 수 있고, 도자수공업은 왕실과 관련된 특수한 상황 때문에 여전히 관장제 수공업으로 존재하는 여러 가지 변화라고 이해 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에 대한 대우도 열악하여 도망이 잦았고, 이로 인해 1700년을 전후로 분원의 운영방식은 전속장인제로 전환된 것으로 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기명이 훼손되었지만 제작 여건의 약화로 백자제작에는 차질이 있었지만, 금속 재료의 부족으로 인한 대체용기로서 백자의 수요가 오히려 증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자의 수요가 증가한 것 외에 지방백자의 제작이 활발하게 된 원인으로는 인구의 증가와 흉년에 따른 경제적 당위성으로 인한 상업의 발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인구 증가와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 졌다. 농사짓는 것으로는 생계가 어렵다고 느낀 일부 백성들은 수공업과 상업을 선택하게 된다. 또 여기에 국가에서 운용하던 수공업체제가 바뀌면서 일부 수공업자들이 지방에서 상인에게 소속되어 종사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이런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이 생계를 위해 물건을 제작하고 유통하면서 시장이 발달하고, 상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상주지역의 사회구조와 변화 양상은 현존하는 18세기 상주의 양안과 호적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바볼수 있다. 상주양안과 호적을 토대로 상주지역 사회변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전란의 충격과 함께 상주지역에서도 신분상승이 진행되어 서서히 신분제의 동요가 격화되었으며 이는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제 상주지역 사회의 전통적 양반지배질서는 경상도 주변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세사회의 몰락과 더불어 점차 그 해체의 길을 걷게 되면서 상주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서원이 건립되는 등의 사회전반에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지방관아에서 사용되는 도자기는 지방에서 생산하는 체제로 변화된다. 즉 영남 여러 고을의 향교에서 쓰는 제기는 그 고을에서 제작되었던 것을 알수가 있다.

     사기가 대중에게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는 ‘尙州郡 外西面 大田里窯址’ 를 살펴보면, 이 요지에서는 15~19세기에 해당하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산출되는데 대부분 백자가 주류를 이른다. 이들 자기편 중에는 <下僧堂>(그림3-1)(그림3-2)이라는 백자철화명문편이 전국에 걸쳐 처음으로 수습되었다. 이<下僧堂>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시찰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堂과 관련된 상주지역의 유적을 살펴보면, 養眞堂, ?作堂, 東學敎堂, 蒼石祠堂, 道谷書堂, 修養書堂, 城隍堂, 甄?祠堂, 洛上里馬堂등이 있다. 그리고 <그림4-1, 그림4-2>는 19세기~20세기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수습한 진사백자가 있다. 이 백자접시는 글씨인지 그림인지 알수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소장의 <그림5>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사용된 안료가 진사라고 보인다. 그 동안 지방에서 진사백자의 첫 번째 발견된 보고로는 2007년 1월 20일 양구 방산자기박물관<그림6>이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1000임에서 진사도편을 처음으로 수습 발표한 이후, 신안리가 두 번째이다.그러나 여타 도자기에 비해 유존 작이 적은 편이며, 많은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어 그 상당부분은 실태조차 파악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조선 진사백자 연구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명확한 조선 후기 요지 발굴품이나 기년작이 적어 정확한 시기 결정과 제작지에 문제를 함께 안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유존작의 희소성을 감안해보면, 신안 1요지의 진사백자편은 한정된 제작지에서 특정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이는 상주지역의 지리적 교통로와 함께 상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적 기반의 토대가 상주지역에도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중세사회의 몰락과 함께 인구증가에 따른 농업 및 상업의 발달로 인해, 18~19세기에는 전국의 시장 수가 1천개소를 넘고 있음을 대변해준다. 정기장시의 상설시장화 외에도 일정한 지역권내에서 날짜를 달리하면서 정기장시가 번갈아 열려 한 달에 20일 이상 장을 볼 수 있는 형태도 생겨나는 것을 볼 때 당시의 활발한 생산과 교역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정기장시로 인한 유통경제가 확산됨에 따라 전국적인 장시의 증가로 자기의 수요와 확대가 활발하게 유통되었을 것으로 본다.

     19세기 초에는 장시의 수가 크게 급증하여 상주에서는 자기와 토기시장이 개설되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상주지역에서 많은 도자기가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관아나 상주를 중심으로 한 일정지역에 민간용 사기를 공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시장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상주지역의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북 영동군 추풍면 신안리 2·3·4·5·6요지, 상주시 중동면 간상리·우물리·신암리, 상주시 모동면 반계리 1·2·3요지,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4요지, 상주시 모동면 대포리 1·2·3요지, 상주시 낙동면 신오리,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상주시 외서면 대전리, 상주시 은척면 황령2리 1·2요지가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관치 즉 관 주도의 지방지배는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시도되었고, 18세기에 접어들어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또 국가 차원의 읍지와 지도, 주베별 지리서를 편찬하여 지방 정보를 종합화하였다. 이를 통해 행정적 파악의 객관화, 정확성의 증대, 종합화 등을 이루었다. 백자의 특징은 자기의 수요확대와 제사의 확대로 인한 제기의 제작이 또한 증가하는 특징을 들 수 있다. 18~19세기 국가 주도의 지방세력 강화는 전 국토와 전 국민에 대한 평등적 파악과 대우라고 하는 국가의 정책적 의지가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이는 수령권 강화는 물론, 행정체제, 관료제강화, 각종 제의의 통제와, 향교 교육 강화, 읍지·지리지 발간 등 전방위적으로 연계되어 추진되었다.

     이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지배력은 근대에 버금가는 상태로까지 발달하였는데 19세기에는 지방에서도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19세기 말 분원이 민영화될 때까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백자의 질이 하락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소요되는 자기의 생산을 그 지방에서 맡았을 것으로 본다. 상주지역의 19세기 요지로는 신안리 1·2·4요지, 백학 1요지, 대전 1요지, 황령 1·2요지가 있다. 이 요지 중 청화백자가 주로 많이 출토되는 지역으로 신안리 1·2·4요지와 백학 1요지에서 많은 자편이 출토된다.



    3) 상주지역 도자의 위치와 의의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하여 상주지역이 차지하는 조선후기의 도자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상주지역은 조선전기의 발달한 도자기술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하면서 많은 수의 요지가 양산되었다. 조선전기의 관요산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요지로는 화현리·대전리 요지가 있다. 조선시대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많은 수의 요지들이 증가하게 되는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지방에서 발달한 장시가 형성되면서 자기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시장논리와 결부된 많은 요지의 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지역에서 소비되는 백자의 생산을 상주지역에서 상당부분 담당하였기 때문에 확대된 도자의 수요를 충당하였던 것을 알 수있다. 임란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는 시기 백자생산의 양상은 중앙 관요와 지방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보인다는 것을 알수 있다. 특히 조선관요에서는 임진왜란이전 청화백자를 제작하였지만 청화안료의 구입이 어려워지자 철화백자로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아 철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관요의 경우 17세기 후반에 다시 청화백자의 제작이 이루어지나 지방에서는 비교적 오랫동안 철화제작을 하다가 청화로 대신하여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지역도 또한 거의 유사한 형태의 발전을 보이는데 이지역이 다른 지역과 긴밀한 교류가운데서 백자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고, 당시의 도자생산은 전국적인 상호관련 아래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상주는 상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도자생산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음에 틀림없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상주지역의 도자사적 위치를 문헌자료와 발굴기록을 통해 살펴보았다.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몇몇 자료에만 의존하여 서술하였음을 밝히며, 본인의 고향으로 써 상주지역은 상주목이라고 하여 역사가 깊고 오래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주지역의 지역적 중요성을 보더라도 문화적인 연결고리의 한 괘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근간을 이행하는 과정의 하나인 자기제작에 필요한 원료와 남쪽으로의 낙동강->왜관->부산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소백산백(문경)->육로이동->남한강->한영으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교통로를 갖춘 곳의 한곳이 경북 상주지역이었다.

     상주의 도자생산의 역자석 배경의 사료로는 『慶尙道地里志』,『太宗實錄』, 『世宗實錄』, 『地里志』, 『慶尙道續撰h地里志』등이 있으며, 도자재료의 필수적인 원료인 석영·장석·흑운모·백운모 등으로 구성된 변성암복합체지역이다.

     상주지역은 조선전기의 발달한 도자기술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하면서 많은 수의 요지가 양산되었고, 관요산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요지로는 화현리·대전리요지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에서 발달한 장시가 형성되면서 자기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시장논리와 결부된 많은 요지의 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상주지역에서 소비되는 백자의 생산을 상주지역에서 상당부분 담당하였기 때문에 확대된 도자의 수요를 충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상주는 상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도자생산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1. 김종태,『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한 상주백자 연구』

    2. 김종태,『尙州地域 朝鮮白磁의 自然科學的 分析』

    3.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고고학사전』

    4. 尙州市長, 『尙州의 文化財』

    5. 김영원, 『광주분원과 조선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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